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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 전 대통령 국민장] 서거 당일 행적 비교…6시 17분 '대통령 안 보인다' 6시 45분 '차를 대라'

노무현 전 대통령이 투신한 뒤 발견되기까지는 긴박한 순간의 연속이었다. 노 전 대통령은 23일 오전 5시45분 봉하마을 사저에서 유서를 저장한 직후 "산책을 나갈게요"라며 이병춘 경호관에게 연락 2분 뒤 산행에 들어갔다. 등산로 입구에선 마늘밭에서 일하던 동네 친구 박모(63)씨를 만나 "일찍 나왔네요" "마늘 작황이 어떻노"라며 인사를 나눴다. 산행 도중 정토원에서 100m쯤 떨어진 지점(봉수대 0.37㎞ 이정표)에 도착하자 "힘들다 내려가자"고 경호관에게 말했다. 경호관은 사저 경호실(CP)에 있는 신모(38) 경호관에세 "하산하신다"고 무전 연락을 했다. 하산 중 오전 6시10분 부엉이 바위에 도착했다. 노 전 대통령은 "부엉이 바위에 부엉이가 사나" "담배가 있나"라고 물었다. 경호관이 "없습니다. 가져오라 할까요"라고 답했지만 "됐다"고 했다. 노 전 대통령은 폐쇄된 등산로에 사람이 다닌 흔적을 보고 "사람이 다니는 모양이네"라고 말했고 부엉이 바위보다 5m 정도 뒤에 있는 묘지 옆 잔디밭에 앉았다. 경호관에게 "정토원에 법사가 있는지 보고 오지"라고 심부름을 시켰다. 경호관이 "모셔올까요"라고 하자 "아니 그냥 확인만 해봐라"고 지시했다. 경호관은 정토원으로 뛰어갔다. 이때가 오전 6시14분. 정토원 공양관 앞에 도착한 경호관은 법사가 있는 것을 확인하고 뛰어서 되돌아왔다. 부엉이 바위에 도착한 시간은 3분 뒤인 6시17분. 그러나 자리를 비운 3분 사이에 노 전 대통령은 보이지 않았다. 이 경호관은 갖고 있던 휴대전화로 CP의 신 경호관에게 연락했다. "심부름 다녀온 사이 대통령께서 보이지 않는다. 나와서 내려오시는지 확인 좀 해라." 이 경호관도 마애불.부엉이 바위 능선길 등 일대를 뒤졌다. 6시23분 신 경호관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 "찾았나 안 보이나"라고 물었고 신 경호관은 "안 보인다"고 했다. 또 "저수지나 연꽃밭 쪽을 찾아봐라"는 통화도 했다. 노 전 대통령을 찾다가 정토원 요사체 앞에서 만난 법사가 "무슨 일이지 VIP(노 전 대통령) 오셨어"라고 묻자 "아무것도 아닙니다"라고 답했다. 다시 부엉이 바위에 뛰어온 이 경호관은 부엉이 바위 밑에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등산로로 내려가 부엉이 바위 아래에서 흰옷을 발견했다. 산 아래쪽을 보고 누워 있는 노 전 대통령도 찾았다. 이때가 6시45분. 노 전 대통령이 사라진 지 31분 만이다. 이어 이 경호관은 "차를 대라"고 CP에게 연락했다. 얼굴을 흔들어 보고 맥박을 확인했으나 뛰지 않았다. 우측 어깨에 노 전 대통령을 메고 66m가량 뛰어 내려와 두 차례 인공호흡을 시도하자 차가 도착했다. 대통령을 안고 뒷좌석에 앉아 진영읍 세영병원으로 옮겼다. 다시 양산 부산대병원으로 옮겨진 노 전 대통령은 이날 오전 9시30분 사망 판정을 받았다. ◆부실 수사 논란=이 경호관은 1991년 경호원 공채로 채용돼 노 전 대통령 취임 당시부터 경호했다. 2008년 노 전 대통령의 퇴임과 함께 봉하마을에서 계속 경호업무를 수행해 왔다. 이 경호관은 그동안 4차례 경찰 조사를 받으면서 엇갈린 진술을 했다. 이 경호관은 "사건 발생 직후 요인을 완벽히 지키지 못했다는 충격과 신분상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는 심리적 압박으로 허위 진술을 하게 됐다"고 주장했다. 경찰의 초기 수사가 부실했다는 지적을 피할 수 없다. 경호관의 무전기 교신 기록 청와대 경호실의 CCTV(폐쇄회로TV) 화면 정토원 법사 등을 제대로 조사하지 않았다. 창원=황선윤 기자

2009-05-27

[노 전 대통령 국민장] 한국 장례일정 맞춰 미 전역서 추모행사

노무현 전 대통령의 영결식이 한국시간으로 29일 오전 11시(LA시간 28일 오후 7시) 경복궁 앞뜰에서 거행되는 것에 맞춰 미주 한인들도 추모행사를 개최한다. LA에서는 10개 단체가 참여한 '대한민국 제16대 노무현 대통령 남가주추모위원회'의 주도로 노동상담소에서 마련된 분향소에서 영결식을 생중계 함께 지켜본다는 계획이다. 이어 내일(29일) 오후 7시에는 임마누엘 교회에서 '추모의 밤' 행사를 개최 추모사와 노 전 대통령의 생전 동영상을 방영한다. 김인수 사무총장은 "오늘은 분향객들과 함께 영결식을 실시간으로 지켜보고 내일 '추모의 밤' 행사를 통해 고인을 기릴 것"이라고 말했다. 애틀랜타 지역에서도 같은 날 오후 7시30분 도라빌 스프링홀에서 '노무현 전대통령 추모의 밤'을 개최한다. 주최측은 추모시 낭송 종이학 접기 합동 분향식 노 전대통령을 추모하는 풍선날리기 등을 가진 후 오후 10시부터 한국에서 열리는 영결식을 함께 지켜볼 계획이다. 뉴욕지역에서는 현지 시간 오후 7시부터 맨해튼 32가 한인타운 거리에서 멀티비전이나 프로젝터를 통해 인터넷 생중계를 통해 영결식을 함께 한다. 필라델피아에서도 서재필 기념센터 강당에서 29일 오후 7시 한인동포단체 협회 등 한인들이 참석한 가운데 노 전대통령의 생전 활동 모습을 담은 영상을 소개하는 '추모의 밤'행사를 갖는다. 메릴랜드 지역에서는 오후 8시부터 앨리컷시티 롯데 앞 광장에서 노 전대통령을 추모하는 촛불 집회가 열린다. 이날 집회에는 풍물패 한판의 공연 추도시 낭독 등을 통해 노 전대통령의 삶을 조명한다. 한편 지난 27일 LA한인타운 노동상담소와 LA총영사관에 마련된 분향소를 비롯 미주 곳곳에 마련된 분향소를 찾는 한인들의 발길은 끊이지 않았다. 서기원 기자 kiwons@koreadaily.com

2009-05-27

[윌셔 플레이스] '노짱'과 '소중한 타인'

어렸을 적 경험했던 충격은 평생 잠재의식의 언저리를 맴돌게 된다. 그러다가 성인이 돼 비슷한 사건을 접하게 되면 옛 기억이 문득 떠올라 충격은 더욱 커진다. '운남' 이승만의 장례식이 이런 경우다. 1965년 7월의 한여름 무더위 속에서 치러진 그의 운구행렬은 40 여 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게 다가온다. 종로 길을 꽉 메운 수십만 인파. 상투 틀고 갓 쓴 할아버지들을 비롯해 소복 차림의 여인네들까지 나와 그의 마지막 길을 배웅했다. 조선시대에 살아보지 못해 알 수는 없지만 그때도 임금이 붕어하면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몰렸을까. '나랏님이 돌아가셨다. 불쌍해서 어떻게 하나.' 눈물을 흘리는 어른들을 현장에서 보고는 적잖은 쇼크를 받았다. 불과 몇 년 전만해도 '부정선거 다시 하라'며 민주화 시위를 벌이던 대학생 형님들에게 발포명령을 내려 전국민의 분노를 샀던 이 박사가 아닌가. 수백 명의 목숨을 앗아간 4ㆍ19 혁명은 뭐란 말인가. 그의 유해가 망명지인 하와이에서 서울로 돌아온 그날 호칭이 '살인마ㆍ독재자'에서 '나랏님'으로 바뀌었으니 어린 나이에 머릿속이 혼란해졌다. '아 죽음은 아름다운 것이구나. 그가 저질렀던 죄악들이 모두 용서를 받다니….' 그때 어줍잖게도 '죽음의 미학'이 바로 이런 게 아닐까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이승만의 장례식이 갑자기 생각난 건 노무현 전 대통령의 비극적인 죽음 때문이다. '노짱'이란 친근감있는 이름으로 불려졌던 전직 대통령. 그런 그가 투신 자살이란 극단적인 방법으로 생을 마감해 온 나라가 충격에 빠져있다. 무엇이 그를 죽음으로 내 몬 것일까. 검찰 소환이 직접적인 원인이 됐겠지만 보수와 진보의 이념적 갈등도 그의 죽음과 관련이 있지 않나 싶다. 재임시절 "반미 좀 하면 어떠냐" "북한의 핵을 자위수단으로 생각해 볼 수도 있지 않느냐"는 등 돌출성 발언으로 미주한인들에게도 속앓이를 하게 만든 그였다. 우익 세력들에게 '친북'으로 낙인 찍힌 정치인. 보수 정권이 들어선지 얼마 안 돼 가족과 친.인척 지인들이 부패혐의로 줄줄이 구속되거나 조사를 받게 되자 이를 참다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 같다. 노무현 추모 열기에 묻혀 있는 대한민국. 사회심리학적 표현을 빌자면 '노짱'은 이 시대의 'SO'로 자리매김한 듯한 느낌이다. '소중한 타인'(Significant Other)의 머릿글자를 따 만든 말로 혈육은 아니지만 개인의 가치관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사람을 일컫는 용어다. 삶의 동반자 또는 스승이라고 할까. '노사모' 회원들을 비롯한 그의 지지자들에게 노무현이란 이름 석자는 이제 SO나 다름없게 된 것이다.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이라는 말을 남기고 떠난 노 전대통령. 어쩌면 이 한마디에 그의 정치적 유산이 담겨져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진보와 보수 역시 정치의 한 조각이 아닌가. 하지만 현실에선 양 측이 '공공의 적'이 된지 10년도 넘는다. 아직도 이분법적 사고의 덧에 갖혀 있는 한국사회. 그의 죽음이 이념의 양극화 현상을 더욱 부채질하지 않을까 한편으론 걱정이 되기도 한다. 비록 해서는 안 될 선택을 했지만 그의 죽음이 '미학'으로 남는 길은 오직 하나 뿐. 진보와 보수는 서로 증오의 대상이 아닌 동반자라는 인식을 공유할 때 비로소 가능하지 않을까. "누구도 원망하지 마라." 그는 유언장에서 이렇게 당부하지 않았는가.

2009-05-27

[풍향계] 말이 칼이 될 때

노 전 대통령의 서거와 관련해 말들이 쏟아지고 있다. 대부분은 애도와 추모와 안타까움의 표시들이지만 간혹 냉소적인 반응도 들리고 가시 돋친 비아냥도 들린다. 저마다 생각과 견해가 다를 수 있다. 어떤 말이든 할 수가 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의견들이 모여 여론이 되고 민심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요즘 난무하는 말을 대하다 보면 맹목적 옹호나 살벌한 비난으로 너무 쉽게 내 편 네 편을 가른다는 생각이 든다. 너무 간단히 정의와 불의를 구분짓는다는 느낌도 든다. 특히 유명인들이 툭툭 내뱉는 의외의 한마디를 대할 때면 더욱 그렇다. 얼마 전 김동길 연세대 명예교수는 노무현 전 대통령을 겨냥해 '자살하든지 감옥에 가라'는 글로 논란을 일으켰다. 그리고 비난하는 네티즌들을 향해 다시 "이 나라에는 법은 없고 감정과 동정 뿐이냐"며 "모든 비극의 모든 책임은 노무현씨 자신에게 있다"고 주장해 그들을 더욱 자극했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할 말은 해야 한다는 신념은 중요하다. 그러나 때로는 말을 감추거나 아껴야 할 때도 있다. 김 교수에게는 지금이 그럴 때였다. 그저 유감이라는 한 마디였으면 족했다. 그게 아니라면 차라리 침묵하는 편이 나았다. 전직 대통령의 죽음 앞에서 그와 같이 말하는 것은 소신이 아니라 무례이기 때문이다. 또 변희재 미디어발전국민연합 공동대표는 노 전 대통령을 "측근 살리고자 몸 던진 조폭 보스"라며 "그의 장례식에 국민 세금 1원도 쓰면 안 된다"고 주장했다. 이 역시 해서는 안될 말이었다. 말 품세도 그렇거니와 세금 1원이 중요한 만큼 상심하는 국민들의 마음을 달래는 일도 국가의 중요한 책무이기 때문이다. 분향소 설치에 극구 반대하면서 "자살한 사람에게 무슨 분향소냐"고 내뱉은 이효선 광명시장도 마찬가지다. 이런 말들은 노 전 대통령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는 사람들에겐 가공할 언어폭력이었다. 노 전 대통령을 비판하던 사람들조차 비난하고 있는 것은 그래서 당연해 보인다. 노 전 대통령은 생전에 참 많은 말을 했었다. 소신 있는 발언으로 칭송도 받았지만 또 그만큼 많은 사람을 불편하게도 했었다. 그러나 죽음 앞에서 그는 뜻밖에도 말을 아꼈다. 할 말이 정말 많았을 터인데도 원망하지 말라 작은 비석 하나 남기라는 것 정도 뿐이었다. 평소의 그 답지 않은 말의 절제였지만 그 속엔 자신의 죽음이 또 다른 갈등의 불씨가 되기를 바라지 않는다는 깊은 당부의 뜻이 담겼다고 나는 믿고 싶다. 그러나 그의 당부와 아랑곳없이 남은 자의 말들은 제 갈길만 가고 있다. 이미 한 쪽에선 전 대통령의 죽음을 정치적으로 이용하지 말라며 눈을 부릅뜬다. 그러나 화합과 안정을 외치는 자신의 말이 오히려 분열의 단초가 되고 있음은 보지 못한다. 또 한쪽에선 앞뒤 가리지 않고 '오냐 두고 보자'며 결기를 세운다. 이 역시 전투를 앞둔 병사의 출정가처럼 강퍅하게만 느껴진다. 말은 해야 하고 논쟁도 필요하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다. 장례식 기간 만이라도 이어지는 추모 기간 만이라도 서로의 속을 헤집지는 말은 삼가야 한다. 송곳 같은 뾰족한 혀로 서로를 찌르지 말아야 한다. 지금은 의견을 주장하고 관철시킬 때가 아니라 조용히 듣고 지켜보는 것이 훨씬 더 가치로울 때이기 때문이다. 말이 입힌 상처는 칼이 입힌 상처보다 훨씬 더 깊다고 했다. '오늘 내가 하는 한마디 내가 쓰는 한 줄 글이 누군가에게 향기를 묻히는 정다운 벗이기를 평화의 노래이기를….' 이해인 수녀의 시구처럼 지금은 우리도 매일 아침 이렇게 기도해야 할 때다. 그것이 고인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다.

2009-05-27

[사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했다. 전임 대통령이 퇴임 후 자살로 생을 마감한 사태 앞에서 한국민 뿐만 아니라 미주 한인들도 충격과 비통함을 감출 수가 없다. 한국 현대사에서 전임 대통령들의 임기 이후가 명예스럽지는 못했지만 자살이라는 극단의 방법을 택한 대통령은 없었다. 이를 보는 국민들의 마음은 더욱 안타깝기만 하다. 노 전 대통령의 통치는 공과가 교차한다. 귄위주의를 타파한 서민적인 풍모는 정치계에 새 바람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국가권위와 정체성을 훼손했다는 비난을 피할 수 없었다. 대통령 서거의 슬픔이 채 가라앉기도 전에 현재 보수와 진보의 갈등이 심화되고 정파간의 분쟁이 표면화되고 있다. 진보 진영은 현직 대통령과 검찰의 책임론을 주장하면서 관련 당사자들의 문책을 요구하고 있다. 이에 대해 보수 진영은 노 전 대통령의 국민장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거나 변질시키지 말라고 목소리를 높이는 상황이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노 전 대통령의 서거를 객관적인 시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자살을 할 수 밖에 없었던 개인적인 심정을 임의로 재단해서는 안되겠지만 일국의 통치자였던 공인의 자살이 가져온 엄청난 사회적인 파장도 직시해야 한다. 또한 비극적인 상황이 불러 온 사적인 감정으로 인해 객관적인 판단이 흐려져서도 안된다. 한국 현대사에서 국가 권력과 연루된 비극은 더 이상 없어야 한다. 더욱이 보수와 진보 정파간의 갈등으로 국론이 분열되는 상황은 막아야 한다. 이제는 갈라지고 찢겨진 마음을 치유해야 할 때다. 전직 대통령의 서거를 정치적으로 한단계 성숙해지고 새로운 화합의 사회를 만드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서거의 슬픔과 충격을 정치선진화로 승화시키는 것이 지금 우리 국민들이 할 일이다.

2009-05-27

대통령 자문위원 출신 안병우 교수 '노 전 대통령, 기록 중요성 알아'

지난 24일 고 노무현 대통령 워싱턴 범동포 추모위원회가 마련한 분향소에는 노 전 대통령과 특별한 인연을 가진 한 학자가 울먹이며 헌화하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현재 조지워싱턴대학 교환 교수로 워싱턴에 체류중인 한신대 안병우 교수는 노무현 전 대통령 재임 중인 참여정부 시절 2년반 동안 대통령 자문기구인 정부혁신지방분권위원회의 기록관리혁신전문위원회에서 간사를 맡았었다. 이 위원회에서는 ‘국가기록관리 혁신과제 추진계획’을 주도했었다. 안 교수는 우선 노 전 대통령을 ‘굉장히 특이한 대통령’으로 기억했다. 그간 한국의 역사를 통틀어 전직 대통령들은 자신들의 통치행위와 관련한 아무런 기록을 남기지 않았었다. 가령 현재도 국가기록원에는 최규하 전 대통령의 취임사가 보관돼 있지 않다. 또 대통령이 장관 등을 임명할 때 보고받은 인사 검증 자료나 청와대 사정 파트에서 작성한 비리 관련 자료 등도 전혀 없다. 물론 박정희 전 대통령 집권 시절 국가재건최고회의 회의록과 10월 유신 단행 배경 문서 등도 찾을 수 없다. 전두환 전 대통령 시절의 삼청교육 및 언론 통폐합 관련 기록도 사라졌다. 급기야 기록원 측에서는 지난 수년간 전직 대통령을 찾아 다니며 회고담을 듣거나 개인적으로 보관중인 기록을 건네줄 것을 요청했다. 하지만 노 전 대통령은 취임 초기부터 비서관과 관련 부서 공무원 등을 상대로 기록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누차 강조했다고 한다. 안 교수는 “노 대통령의 이런 기록의 중요성에 대해 자주 언급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청와대 어떤 비서관들도 그 어느 누구도 이를 잘 이해하지 못했었다”고 말했다. 심지어 한 주무 비서관은 안 교수에게 직접 찾아와 “대통령께서 기록이 중요하다고 하는데 뭘 어떻게 시작해야 하느냐?”며 자문을 구하기도 했다는 것. 안 교수가 몸담았던 기록위원회에서 가장 먼저 한 일은 정부의 각 부처 모든 기록들을 통합해 모으는 일이었다. 또 대통령 기록관을 임명해 대통령의 모든 언행을 기록하도록 했다. 이는 결국 행정의 투명성과 책임성을 정착시키고 정책기록 결정 과정을 가장 정확하게 이끌어 내기 위한 노력이었다. 기록관리혁신전문위원회는 지금의 국가기록원으로 승격돼 정부의 각종 기록을 보관하고 있다. 얼마전 한국에서는 이 국가기록원과 노 전 대통령 사이에 해프닝도 있었다. 노 전 대통령이 퇴임 후 정부 기록을 유출해 사저로 가져갔다는 내용이었다. 안 교수는 이와 관련해서도 “반출이라는 표현은 적절치 않다. 기록의 원본은 기록원에 보존돼 있는 상태에서 사본을 가지고 나온 것이다. 이 기록물은 비밀문서가 아니기 때문에 기밀유출과도 거리가 멀다”고 말했다. 노 전 대통령도 모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전직 대통령으로서 회고록을 출간 등에 필요한 각종 참고기록은 확보하고 있어야 하기 때문에 꼭 필요한 부분이다”고 해명한 바 있다. 안 교수는 “기록의 중요성을 강조한 노 전 대통령의 한 단면을 보더라도 그 분의 성품을 알 수 있다”며 “이는 투명성과 합리성으로 점철되는 고인의 품성과도 연결되는 부분인 것 같다”고 회고했다. 천일교 기자

2009-05-27

노무현 전대통령 투신 때 28분간 혼자 있었다…경찰 '경호관은 정토원에 심부름'

노무현 전 대통령은 23일 오전 봉하마을의 봉화산 부엉이바위에서 이모(45)경호관 없이 혼자 28분간 있었으며 이 사이 투신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 경호관은 또 투신한 노 전 대통령을 뒤늦게 발견해 응급치료를 하다가 업고 마을까지 내려와 경호차로 병원에 후송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운우 경남지방경찰청장은 27일 오전 노 전 대통령의 빈소에 조문한 뒤 "이 경호관이 자리를 비운 뒤 노 전 대통령을 다시 발견할 때까지 28분 가량의 시간이 있었다"며 "노 전 대통령은 이 때 투신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 청장은 "노 전 대통령은 23일 오전 6시14분께 부엉이 바위에 도착해 담배 얘기를 한 뒤 오전 6시17분에 경호관에게 '정토원 원장이 있는지 확인해 보라'고 말했고 경호관이 '모셔 올까요'라고 묻자 '그냥 확인만 해봐라'고 심부름을 시킨 것으로 조사됐다"고 설명했다. 경찰은 26일 오후부터 이뤄진 이 경호관에 대한 3차 조사에서 무전통화기록 등을 들이대며 이 경호관의 이 같은 진술을 받아낸 것으로 전해졌다. 이 청장은 "경찰이 확인한 통화(교신)기록과 경호관의 진술로 미뤄 그렇게 추측된다"고 덧붙였다. 이 경호관은 23일 1차 조사 때는 부엉이 바위에 노 전 대통령이 등산객 이야기를 꺼낸 뒤 투신했고 자신은 뒷모습을 봤다고 진술했다. 이 청장은 "경호관이 없어진 노 전 대통령을 찾다가 발견한 것이 오전 6시45분이어서 결국 노 전 대통령은 28분간 혼자 있었으며 경호관은 노 전 대통령을 뒤늦게 발견해 응급치료를 하다가 병원으로 이송했다"고 설명했다. 이 청장은 "노 전 대통령의 서거와 관련한 조사가 아직 100%된 것은 아니다"면서 추가 수사중 임을 밝혔다.

2009-05-26

[노무현 1946-2009] 경호관 진술번복 왜? 꼬리무는 의문

이 모 경호관은 3차례에 걸친 경찰 조사 때마다 진술을 번복해 그 경위에 대해 의문이 꼬리를 물고 있다. 첫번째 조사에서 이 경호관은 "부엉이바위에 도착해 이야기를 나누다가 '저 아래 사람이 지나간다'는 노 전 대통령의 말에 아래를 내려다보는 동안에 뛰어내렸다"고 진술했다. 하지만 두번째 조사에서는 부엉이바위를 지나 (노 전 대통령 부모의 위패를 모신) 정토원까지 올라갔다가 노 전 대통령을 먼저 내려보내고 자신도 내려갔다가 사고가 벌어졌다고 말을 바꿨다. 서거 직전의 행적에서 '정토원 방문'이라는 사실을 감추고 있었던 것이다. 이 경호관은 "대통령께서 굳이 말하지 말라고 해서 그렇게 했다"고 해명했지만 경호대상이 사망한 상황에서 이 같은 중요한 사실을 감춘 것은 의문이다. 사건 직전 행적에 대해 의문이 꼬리를 물고 혼자 있는 경호관을 만났다는 등산객의 증언이 나오자 26일 경찰은 부랴부랴 이 경호관을 재소환해 경위를 추궁해 "마지막 순간에 곁에 없었다"는 증언을 받아냈다. 그렇다면 경호관은 왜 거짓말을 했을까. 우선은 상식적인 선에서 본인이 끝까지 경호 임무를 수행하지 못한 데에 대한 자책감과 문책의 두려움이 이유일 수 있다. 경호관은 3차 조사에서는 "(지나가는) 등산객을 아래로 데려다주고 올라와보니 대통령께서 사라지고 없었다"고 진술했다. 두번째 경호팀이 상황을 알고도 사실을 숨겼다면 복잡해진다. 전직 대통령 마지막 순간의 집단적인 조작 및 은폐가 벌어지는 셈이다. 일부 언론이 보도한 것처럼 "놓쳤다" "보이지 않는다" 등의 내용을 담은 무전 교신이 있었다면 이 같은 집단 은폐의 가능성도 없지 않다. 경위가 어찌됐든 노 전 대통령의 마지막 행적이 미스테리에 빠지면서 경호관 진술에 근거했던 마지막 모습도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커졌다. "담배 있나요" "없습니다 가져올까요" 등의 대화 "저기 사람이 있다" 등의 언급도 최후의 순간이 아닐 가능성이 있다는 말이다.

2009-05-26

[노무현 1946-2009] '장지' 사저옆 야산…비석만 세우고 평장식 안장 고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장지가 사저 옆 야산으로 결정된 것으로 알려졌다. 26일 노 전 대통령측에 따르면 이날 오전 유가족이 가족회의를 통해 노 전 대통령의 사저 옆인 김해시 진영읍 본산리 12번지 일대를 장지로 정했다. 노 전 대통령측은 사저에서 서쪽으로 50여 떨어진 이곳은 전체 660㎡ 규모로 그 가운데 100여㎡에 비석을 세우고 노 전 대통령의 유해를 안장할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 노 전 대통령측은 이 장지에 비석만 세우고 봉분없이 평장식(平葬式)으로 안장하는 것도 고려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앞서 노 전 대통령측은 이날 오전 7시께 김해지역의 유명 지관인 구모(80) 옹을 불러 사저 옆 야산을 둘러보게 했다. 구 옹은 "노 전 대통령의 장지는 관광지 겸 선산으로서 많은 사람이 볼 수 있는 자리가 될 것"이라며 "봉하마을을 찾은 사람들이 사저 등을 둘러보고 휴식도 취할 수 있는 위치가 될 것"이라고 해당 부지에 대해 긍정적 반응을 보인 것으로 전해졌다. 그동안 노 전 대통령의 장지로는 봉하마을 선영과 봉화산 등이 거론돼 왔으나 유가족들이 '집 가까운 곳에 아주 작은 비석 하나만 남겨라'만 노 전 대통령의 유지를 받들어 사저 옆 야산을 장지로 결정한 것으로 보인다.

2009-05-26

[노무현 1946-2009] LA에도 노 전대통령 조문객 이어져…분향소 1200여명 찾아

LA한인타운 2곳에 마련된 노무현 전 대통령의 분향소에도 추모객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분향소 관계자들에 따르면 26일까지 분향소를 찾은 조문객은 1200여명. '대한민국 제16대 노무현 대통령 남가주 추모위원회(이하 추모위원회)'에 따르면 서거 다음 날인 23일 마련된 노동상담소 분향소에는 지난 24일~25일 연휴동안 약 800여명이 다녀갔으며 26일에도 200여명이 찾았다. 또 25일 마련된 LA총영사관 분향소를 찾은 조문객은 200여명. 추모위의 김인수 사무총장은 "주말에는 가족단위로 분향소를 찾는 한인들이 많았고 26일에는 혼자 분향소를 찾는 한인들이 주를 이뤘다"며 "방명록에는 '지켜드리지 못해 죄송하다' '제대로 평가받지 못해서 안타깝다' 등 안타까움을 나타낸 글들이 주를 이뤘다"고 전했다. 김 사무총장은 이어 "연휴가 끝나고 출근한 200여명의 직장인들이 오전10시~12시 짬시간을 이용해 분향소를 찾았다"며 "특히 퇴근 이후 찾아온 조문객도 많았다"고 전했다. 영사관의 한 관계자는 "점심시간을 이용해 방문한 한인들이 많았으며 오후에도 조문객들의 발길이 꾸준했다"며 "특히 눈물을 보이는 여성 조문객들도 많았다"고 말했다. 한편 추모위원회는 오는 29일 오후 7시부터 LA한인타운 원불교(401 Shatto Pl.LA)에서 '추모의 밤'을 개최한다. 서기원 기자 kiwons@koreadaily.com

2009-0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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